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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K-MOOC]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8, 9강 요약

[K-MOOC]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8강 요약




[K-MOOC]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바로가기
http://www.kmooc.kr/courses/course-v1:IHK+IHK01+2021-01-1/about

8강 3.1운동 1
1. 파리강화회의와 2·8 독립선언
 - 파리강화회의
   →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해 개최된 파리강화회의
   →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(Woodrow Wilson)의 민족자결주의 제창
   → 1918년 11월 중순 미국 대통령의 윌슨의 중국 특사 크레인(Charles R. Crane)의 연설
       : “민족자결주의가 파리강화회의에서 패전 후의 식민지 처리 원칙으로 논의 될 수 있다.”
       :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기대
 - 신한청년당
   → 김규식(파리강화회의 파견) →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(외무총장 겸 파리평화회의 대한민국 위원 및 주파리위원부 대표위원 선임)
   → 선우혁, 김철, 서병호, 김순애(국내)
   → 여운형(만주, 러시아)
   → 장덕수·이광수(일본)
 - 전로한족중앙총회(러시아 연해주)
   → 윤해, 고창일(파리강화회의 파견)
 - 대한인국민회(미주)
   → 이승만, 정한경, 민찬호(파리강화회의 파견 시도 / 좌절)
 - 2·8 독립선언
   → 3·1운동을 촉발시킨 순수한 학생운동
   → 2·8 독립선언의 주도층: 일본 유학생 →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는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적용되는 것일 뿐 일본과 같은 승전국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
   → 그러나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소식과 약소민족동맹회의 결의사항에 대응하여 2·8 독립선언 추진
   →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조선독립청년단 대회 독립선언식 거행
   → 각국 대사관과 공사관, 일본 국회위원, 조선총독부, 신문자와 잡지사, 학자들에게 독립선언서 발송(2·8 독립선언서, 결의문, 민족대회소집청원서 등)
   → 실행 위원 27명 체포




2. 3·1운동 준비와 추진
 - 천도교, 기독교, 불교 등 주요한 교단과 학생 중심으로 추진
 - (정치사회단체 해산된 상황에서 합법적인 활동이 가능했던 종교 조직이 주도가 됨)
 - 보수 유림 계열은 3·1운동에 호응하여 137명의 유림 대표가 서명한 파리장서(長書)를 발송
 - 천도교 + 기독교 + 불교 + 학생 → 3·1운동 준비
 - 대중화, 일원화, 비폭력의 원칙 → 신분, 계층, 종교, 직업에 관계없는 광범위한 일반 대중의 참여
 - 민족대표 33인 : 천도교(15명), 기독교(16명), 불교(2명)
 - 만세일자 선정
   → 3월 3일 → 고종의 국장일
   → 3월 2일 → 기독교의 주일
   → 3월 1일 → 만세일로 선정
 -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서 선포(서울 태화관)
 - 선포식에 참여한 29명은 일본 경찰에 의해 연행
 - 오후 2시 30분경 학생 대표들이 독자적인 독립선언식 거행(파고다 공원) → 만세운동의 시작
 - 남녀노소, 상인, 농민 등 다양한 계층, 연령의 사람들이 참여
 - 각종 격문, 신문들이 제작·배포
 - 상인들의 철시
 - 3만 5천장의 독립선언서 전국 배포
 - 독립선언, 시위운동은 3월1일~4월 11일까지 매일 평균 10회 이상 발생
 - 5월 말까지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남
 - 만세시위운동의 형태
   → 시가지 시위, 장터 시위, 봉화 시위
   → 태극기를 이어 받으며 실시하는 릴레이 시위, 상여 시위
   → 철시, 동맹 휴학, 파업, 주재소 습격
 - 어린이 시위, 거지들의 시위, 기생들의 시위 등
 - 총독부의 무차별 진압 → 수천명 살상, 혹독한 고문과 투옥
 - 시위건수(2천회), 참여 인원(2백만명)






 - 중부지역 (서울, 경기, 강원) : 3·1운동의 진원지
 - 서울지역
   → 3월 1일, 5일 두 차례 큰 시위 포함 27일까지 크고 작은 시위 발생(노동자층 참여)
 - 경기지역
   → 전 지역 시위운동, 일제관리 격살, 주재소, 관공서, 면사무소 파괴 및 방화 등 격렬한 양상을 보임
 - 강원지역
   → 3월 말부터 4월까지 격렬한 시위 발생
 - 북부지역 (평안도, 황해도, 함경도)
   → 종교, 학생 조직 등과 연결된 시위운동 전개
   → 3월 하순~4월 초 황해도, 평안도 중신을 격렬한 만세운동 발생
 - 충청도지역
   → 3월 3일 대전 인동 시장, 예산에서 최초의 시위 발생
   → 4월 20일까지 전개(3월 27일부터 4월 8일까지 13일간 격렬한 시위 발생)
   → 충청지역 대표적 시위 방법 : 횃불만세운동
 - 호남지역
   → 전북: 천도교·기독교계 주도
   → 전남: 기독교계 주도
   → 3~5월에 걸쳐 만세 시위 발생
   → 220여회의 만세시위, 약 30여만명 참여
 - 영남지역
   → 기독교 및 학생 조직을 주축으로한 시위 전개
   → 3~4월 말 만세 시위 발생
   → 3월 8일 대구를 시작으로 영일, 의성, 경주, 안동 등 22개 지역에서 만세 시위 발생




9강. 3.1운동 2
1. 해외 한인들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운동
 - 중국 동북지역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운동
 - 북간도
   → 용정 서전벌 독립선언식 개최(3. 13.)
   → 명동학교, 정동학교, 대성학교, 동흥학교, 은진중학교 등의 학생과 일반인 3만여명 참여
   → 옌지현, 허룽현, 왕칭현, 훈춘현 등 각처에서 4월 말까지 만세 시위 지속
 - 서간도
   → 유하현, 통화현, 안도현, 무송현, 장백현, 집안현, 황인현 등지에서 만세시위 발생
 - 러시아 연해주지역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운동
   → 전로한족중앙총회 → 대한국민의회 조직
   → 3월 17일 니콜스크-우수리스크에서 독립선언식 거행 → 블라디보스톡 시위(러시아의 금지)
   → 3월 18일 한인노동자들의 총파업, 신한촌 시위
   → 3월 16일(사할린)
   → 3월 18일(스파스크)
   → 3월 21일(라즈돌리노예)
   → 4월 5일(크라스노예 셀로)
   → 4월 9일(구사평)
 - 미주지역의 독립선언과 만세운동
   → 4월 14~16일 한인자유대회 개최
   →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고 미국 정부와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개최

2. 일제의 3·1운동 탄압
 - 조선총독부 헌병경찰 뿐만 아니라 조선주차군까지 동원하여 무차별 탄압
 - 1919년 3월 1일~5월 말까지 인명 및 재산 피해 상황 –한국독립운동지혈사-
   → 사망 7,509명
   → 부상 15,961명
   → 수감 16,948명
   → 훼손 및 전소된 교회 47개소, 학교 2개소, 민가 715채

3. 3·1운동의 의미와 성과
 - 성별, 신분, 연령을 막론하고 전 계층이 참여한 독립운동
 - 1910년대 확산된 공화주의와 민족주의가 의식 속에 자리 잡으면서 3·1운동 직후 수립된 
   임시정부들은 모두 공화제를 채택
 - 구성원의 역할
   → 종교지도자의 역할은 독립을 선언하는데 그침
   → 실질적인 준비 및 활동은 청년, 학생 계층이 주도
   → 토지조사사업으로 사회경제적 여건이 악화된 농민층 역시 대규모로 참여
 - 파리강화회의의 한국독립문제 상정 좌절
   → 식민지, 반식민지 민족의 독립운동 지원을 표방한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희망과 기대로 이어짐






 - 3·1운동의 결과 임시정부의 수립
   → 연해주(대한국민의회)
   → 상하이(대한민국 임시정부)
   → 국내(한성정부)
   → 1919년 9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통합
 - 평화적인 3·1운동의 실패 → 무장투쟁론의 대두
 - 일제의 식민지 지배 방식 변경(문화통치)
 - 다른 나라의 반외세 운동에 영향
   → 중국 5·4, 인도, 이집트의 반영운동 등
 - 독립운동세력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되는 전환점이 되었고 1920년 각계각층의 
   대중운동과 사회운동의 밑거름이 되었음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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