[K-MOOC]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8강 요약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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8강 3.1운동 1
1. 파리강화회의와 2·8 독립선언
- 파리강화회의
→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해 개최된 파리강화회의
→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(Woodrow Wilson)의 민족자결주의 제창
→ 1918년 11월 중순 미국 대통령의 윌슨의 중국 특사
크레인(Charles R. Crane)의 연설
: “민족자결주의가 파리강화회의에서 패전 후의
식민지 처리 원칙으로 논의 될 수 있다.”
: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기대
- 신한청년당
→ 김규식(파리강화회의 파견) →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
이후(외무총장 겸 파리평화회의 대한민국 위원 및 주파리위원부 대표위원 선임)
→ 선우혁, 김철, 서병호, 김순애(국내)
→ 여운형(만주, 러시아)
→ 장덕수·이광수(일본)
- 전로한족중앙총회(러시아 연해주)
→ 윤해, 고창일(파리강화회의 파견)
- 대한인국민회(미주)
→ 이승만, 정한경, 민찬호(파리강화회의 파견 시도 / 좌절)
- 2·8 독립선언
→ 3·1운동을 촉발시킨 순수한 학생운동
→ 2·8 독립선언의 주도층: 일본 유학생 →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는
패전국의 식민지에만 적용되는 것일 뿐 일본과 같은 승전국 식민지에는 적용되지
않을 것이라는 인식
→ 그러나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소식과 약소민족동맹회의
결의사항에 대응하여 2·8 독립선언 추진
→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
조선독립청년단 대회 독립선언식 거행
→ 각국 대사관과 공사관, 일본 국회위원, 조선총독부, 신문자와
잡지사, 학자들에게 독립선언서 발송(2·8 독립선언서, 결의문,
민족대회소집청원서 등)
→ 실행 위원 27명 체포
2. 3·1운동 준비와 추진
- 천도교, 기독교, 불교 등 주요한 교단과 학생 중심으로 추진
- (정치사회단체 해산된 상황에서 합법적인 활동이 가능했던 종교 조직이
주도가 됨)
- 보수 유림 계열은 3·1운동에 호응하여 137명의 유림 대표가 서명한
파리장서(長書)를 발송
- 천도교 + 기독교 + 불교 + 학생 → 3·1운동 준비
- 대중화, 일원화, 비폭력의 원칙 → 신분, 계층, 종교, 직업에 관계없는
광범위한 일반 대중의 참여
- 민족대표 33인 : 천도교(15명), 기독교(16명), 불교(2명)
- 만세일자 선정
→ 3월 3일 → 고종의 국장일
→ 3월 2일 → 기독교의 주일
→ 3월 1일 → 만세일로 선정
-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서 선포(서울 태화관)
- 선포식에 참여한 29명은 일본 경찰에 의해 연행
- 오후 2시 30분경 학생 대표들이 독자적인 독립선언식 거행(파고다 공원)
→ 만세운동의 시작
- 남녀노소, 상인, 농민 등 다양한 계층, 연령의 사람들이 참여
- 각종 격문, 신문들이 제작·배포
- 상인들의 철시
- 3만 5천장의 독립선언서 전국 배포
- 독립선언, 시위운동은 3월1일~4월 11일까지 매일 평균 10회 이상 발생
- 5월 말까지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남
- 만세시위운동의 형태
→ 시가지 시위, 장터 시위, 봉화 시위
→ 태극기를 이어 받으며 실시하는 릴레이 시위, 상여 시위
→ 철시, 동맹 휴학, 파업, 주재소 습격
- 어린이 시위, 거지들의 시위, 기생들의 시위 등
- 총독부의 무차별 진압 → 수천명 살상, 혹독한 고문과 투옥
- 시위건수(2천회), 참여 인원(2백만명)
- 중부지역 (서울, 경기, 강원) : 3·1운동의 진원지
- 서울지역
→ 3월 1일, 5일 두 차례 큰 시위 포함 27일까지 크고 작은 시위
발생(노동자층 참여)
- 경기지역
→ 전 지역 시위운동, 일제관리 격살, 주재소, 관공서, 면사무소
파괴 및 방화 등 격렬한 양상을 보임
- 강원지역
→ 3월 말부터 4월까지 격렬한 시위 발생
- 북부지역 (평안도, 황해도, 함경도)
→ 종교, 학생 조직 등과 연결된 시위운동 전개
→ 3월 하순~4월 초 황해도, 평안도 중신을 격렬한 만세운동 발생
- 충청도지역
→ 3월 3일 대전 인동 시장, 예산에서 최초의 시위 발생
→ 4월 20일까지 전개(3월 27일부터 4월 8일까지 13일간 격렬한 시위
발생)
→ 충청지역 대표적 시위 방법 : 횃불만세운동
- 호남지역
→ 전북: 천도교·기독교계 주도
→ 전남: 기독교계 주도
→ 3~5월에 걸쳐 만세 시위 발생
→ 220여회의 만세시위, 약 30여만명 참여
- 영남지역
→ 기독교 및 학생 조직을 주축으로한 시위 전개
→ 3~4월 말 만세 시위 발생
→ 3월 8일 대구를 시작으로 영일, 의성, 경주, 안동 등 22개
지역에서 만세 시위 발생
9강. 3.1운동 2
1. 해외 한인들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운동
- 중국 동북지역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운동
- 북간도
→ 용정 서전벌 독립선언식 개최(3. 13.)
→ 명동학교, 정동학교, 대성학교, 동흥학교, 은진중학교 등의
학생과 일반인 3만여명 참여
→ 옌지현, 허룽현, 왕칭현, 훈춘현 등 각처에서 4월 말까지 만세
시위 지속
- 서간도
→ 유하현, 통화현, 안도현, 무송현, 장백현, 집안현, 황인현
등지에서 만세시위 발생
- 러시아 연해주지역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운동
→ 전로한족중앙총회 → 대한국민의회 조직
→ 3월 17일 니콜스크-우수리스크에서 독립선언식 거행 →
블라디보스톡 시위(러시아의 금지)
→ 3월 18일 한인노동자들의 총파업, 신한촌 시위
→ 3월 16일(사할린)
→ 3월 18일(스파스크)
→ 3월 21일(라즈돌리노예)
→ 4월 5일(크라스노예 셀로)
→ 4월 9일(구사평)
- 미주지역의 독립선언과 만세운동
→ 4월 14~16일 한인자유대회 개최
→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고 미국 정부와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
위한 목적으로 개최
2. 일제의 3·1운동 탄압
- 조선총독부 헌병경찰 뿐만 아니라 조선주차군까지 동원하여 무차별 탄압
- 1919년 3월 1일~5월 말까지 인명 및 재산 피해 상황
–한국독립운동지혈사-
→ 사망 7,509명
→ 부상 15,961명
→ 수감 16,948명
→ 훼손 및 전소된 교회 47개소, 학교 2개소, 민가 715채
3. 3·1운동의 의미와 성과
- 성별, 신분, 연령을 막론하고 전 계층이 참여한 독립운동
- 1910년대 확산된 공화주의와 민족주의가 의식 속에 자리 잡으면서
3·1운동 직후 수립된
임시정부들은 모두 공화제를 채택
- 구성원의 역할
→ 종교지도자의 역할은 독립을 선언하는데 그침
→ 실질적인 준비 및 활동은 청년, 학생 계층이 주도
→ 토지조사사업으로 사회경제적 여건이 악화된 농민층 역시
대규모로 참여
- 파리강화회의의 한국독립문제 상정 좌절
→ 식민지, 반식민지 민족의 독립운동 지원을 표방한 소비에트
러시아에 대한 희망과 기대로 이어짐
- 3·1운동의 결과 임시정부의 수립
→ 연해주(대한국민의회)
→ 상하이(대한민국 임시정부)
→ 국내(한성정부)
→ 1919년 9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통합
- 평화적인 3·1운동의 실패 → 무장투쟁론의 대두
- 일제의 식민지 지배 방식 변경(문화통치)
- 다른 나라의 반외세 운동에 영향
→ 중국 5·4, 인도, 이집트의 반영운동 등
- 독립운동세력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되는 전환점이 되었고 1920년
각계각층의
대중운동과 사회운동의 밑거름이 되었음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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